[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박철홍(朴哲弘)/ 영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사범대학장과 교육대학원장, 한국도덕교육학회 회장 역임, '스무살의 인문학'등 20여 편의 공저와 역서가 있음

흔히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할 때 ‘지식은 가르치나 인간은 가르치지 않는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이러한 지적은 교육을 통해서 길러야 할 것은 도덕적인 사람 또는 좋은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지식은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문제는 교육의 중점 또는 교육의 목적을 지식교육에 둘 것인가 아니면 인성교육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는 지식과 인성은 전혀 별개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지식과 인성을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생각의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인성교육을 위한 지식교육의 역할을 논의할 것이다.

활동의 목적으로서 외재적 목적과 내재적 목적

어떤 활동을 이야기할 때에 대체로 가장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목적이다. 목적을 생각해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궁극적 목적과 수단-목적의 연쇄적 관계 속에서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학생의 예를 들어보자. 이 경우 아르바이트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며, 돈은 그 목적이 된다.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책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이 경우 책은 목적이 된다. 다시 그 책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며, 지식이 목적이 된다. 지식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며, 이때에는 좋은 성적이 목적이 된다. 이와 같이 수단과 목적의 연결을 계속 따라 올라가면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는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게 된다. 이 경우 교육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의가 갖고 있는 곤란한 점은 역사상 수많은 윤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리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며 이 궁극적 목적이 교육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탐구해야 할 윤리학적․교육학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을 논의하는 또 다른 관점은 외재적 목적과 내재적 목적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외재적 목적은 문자상의 의미 그대로 어떤 활동의 목적을 활동 밖에서 찾는 것을 말하며, 내재적 목적은 활동의 목적을 활동 내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먼저 낚시를 예로 들어 외재적 목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낚시하러 가는 사람은 여러 가지 외재적 목적에서 낚시를 하러 갈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고기를 잡아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낚시대회의 상을 타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낚시모임의 회장이 되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다가오는 단체장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 낚시를 하러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낚시 그 자체가 아니라 낚시하러 간 다른 목적이다. 즉 그 사람들은 가령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경우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 낚시가 아닌 다른 일을 할 사람들이다. 그물로 잡는 것이 더 많은 고기를 쉽게 잡을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낚시를 그만두고 그물질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낚시 이외의 목적에 강조를 두게 되면 될수록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낚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활동으로 변질되게 된다. 단체장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사람의 경우 표를 얻기 위한 목적에 강조를 두게 되면 될수록 낚시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며 실제는 선거유세가 된다.

여기에 대하여 낚시의 내재적 목적은 고기를 낚아 올릴 때 손끝을 따라 온몸으로 전달되는 짜릿한 느낌, 일명 ‘손맛’을 보는 것이다. 이 내재적 가치는 낚시라는 활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활동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낚시의 경우에 낚시를 잘 하면 잘 할수록 낚시꾼은 손맛을 더욱 더 자주 그리고 더욱 더 분명히 맛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낚시를 가르치거나 낚시를 설명할 때에 낚시의 손맛을 빼놓고 낚시를 가르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달리 보면 낚시에 동원되는 다양한 활동들은 바로 손맛을 정점으로 하여 통합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낚시는 곧 손맛과 같은 것이다.

교육의 외재적 목적은 교육을 수단화 한다

낚시의 외재적 목적과 내재적 목적에 대한 논의 형식은 교육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하나의 활동의 목적을 외재적 목적과 내재적 목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교육활동도 교육활동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경우와 교육의 결과 얻게 되는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을 외재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교육이 아닌 다른 것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육을 끌어들이는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 교육을 개인적 차원에서 출세와 부귀나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또는 고등학교 이전의 교육을 대학입학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 사회적 차원에서 사회발전과 같은 사회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발전의 수단으로 보는 것 등이 교육의 목적을 외재적으로 적용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외재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 될수록 관심은 교육이 아닌 다른 것에 두게 된다. 이때 교육활동은 심하게 왜곡되거나 명목상으로만 교육일 뿐 실제적으로는 교육이 아닌 다른 활동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런데 대학생이나 일반 사람들, 심지어 적지 않은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목적을 이야기할 때에 주로 외재적 목적만을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내재적 목적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형식적이고 예우적으로만 인정하고 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학자나 교수가 정치적 활동이나 돈벌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공부나 가르치는 일에 소홀히 하면 본연의 활동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한다. 그것은 분명히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학자는 말 그대로 공부하는 것을, 교수는 가르치는 것을 내재적 활동이요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관련된 교육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재적 목적 또는 내재적 가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즉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교육의 목적을 졸업 후에 좋은 직장을 얻거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의 내재적 목적은 볼 수 있는 눈 즉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내재적 목적 또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는 무엇인가? 입장에 따라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내재적 가치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내재적 목적과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기본적이면서 공통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교육한다는 것은 학습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탐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탐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해를 통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맹목적인 암기는 여기서 말하는 공부에서 제외된다.) 이때 배운 내용은 사람의 내면에 들어와 몸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된다. 지식이 내면에 들어오면 내면의 눈 즉 ‘안목’이 된다.

사물을 볼 때에는 감각의 눈만을 가지고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신체적 ‘감각의 눈’(sight)으로 사물을 본다기보다는 ‘내면의 눈’(insight)으로 사물을 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물 자체는 외면의 눈으로 보지만 사물의 의미는 내면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단지 감각의 눈으로만 본다면 멋진 그림이 그려진 큰 천이나 태극기는 하등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눈으로 본다면 그림이 그려진 큰 천과 태극기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아가 미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은 피카소의 그림, 인상파 화가의 그림, 추상파 화가의 그림과 같은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색채의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고전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고전음악을 들을 때에 갖게 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으며, 심지어 그에게 고전음악은 단지 알 수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색채를 구분할 수 있는 시력은 있으나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심미적인 눈은 없으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력은 있지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음악적인 귀는 없는 것이다. 심미적인 눈과 음악적인 귀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미술과 음악을 공부한 결과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눈과 귀를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매일매일 접하는 수많은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고,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귀를 자극하는 소리로부터 즐거운 음악을 포착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단지 미술이나 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얼른 보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는 지식들도 바로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떤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그 지식을 배우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이해의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것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내면의 눈 즉 안목을 형성하게 된다. 아무리 감각기관이 정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지식을 배움으로써 형성되는 내면의 눈을 갖지 못할 때 감각기관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음악을 배우지 않았을 때 우리의 귀는 단지 소리만을 들을 뿐 음악을 듣지 못하는 ‘음악의 귀머거리’이며, 미술을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의 눈은 단지 색채에 대한 감각적 반응만 있을 뿐,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하는 ‘심미적인 장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지식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대하는 사물이나 현상들은 단지 그저 마주치고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우리와 관련이 있는 의미 있는 대상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인성은 안목의 깊이에 비례한다.

안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주어진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며 나아가 사물이나 현상과 관련된 삶의 사태에 대하여 적절히 행동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그림을 피카소의 그림이라는 사실과 그림의 가격을 아는 것은 매우 단순한 지식이다. 여기에 반하여 그 그림의 미술사적 의의나 그 그림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지식은 앞의 지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차원적인 것이다. 어떤 그림을 ‘피카소의 그림’이라는 명칭 정도를 아는 사람에게 그 그림과 관련하여 그 사람이 보여주는 인성은 그림이 갖는 금전적 가치와 관련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반하여 피카소 그림의 가치를 감상의 측면에서 그리고 미술사적 의의의 측면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앞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성품을 드러내게 된다. 즉 그림(나아가 노래, 물건 등등)을 대하는 동안에 표현되는 사람의 태도나 성품은 그림을 아는 지식에 따라 달라진다. 한마디로 그림을 대하는 것과 관련된 인성교육은 그림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비례한다. 동일한 논리에서 인간과 삶에서 표현되는 인성교육도 상당한 정도 인간과 삶의 성격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지식교육은 인성교육의 필수요소이다

이런 사실에서 유추해 볼 때 지금 우리나라 교육의 결함으로 지적되는 인성교육의 문제는 상당한 정도 암기위주의 지식교육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암기위주의 지식교육은 지식의 깊은 의미를 아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피상적인 사실을 단순 암기하는 교육의 형태이다. 이러한 교육에서 공부는 지식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시험에 나오는 문제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얄팍한 사실을 암기하면 충분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때 공부는 피상적인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게 되며, 그 결과 학습자의 인성도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게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지식을 아는 것은 인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진정한 지식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지식교육의 문제는 지식교육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피상적인 지식교육을 실시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인성교육은 지식교육과 상반되는 것도 아니며, 더욱 더 중요하게 진정한 지식교육은 인성교육에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인성교육을 약화시킨다는 생각은 인성교육을 강화하려는 원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해졌다. 피상적인 지식교육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지식교육을 하는 것은 지식교육이 인간의 안목을 기르는 교육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이며, 나아가 인성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식교육을 위해서나 인성교육을 위해서 지식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하며, 진정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양성, 관련된 평가제도의 확립 등 관련된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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