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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탕] 딴따라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한진오

기사승인 2019.05.16  19: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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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주 목요일에 만나는 뜨겁고 내밀한 제주예술인 인터뷰

제주의 예술인, 한진오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한진오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한진오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겪는 소외를 비틀어 유머로 바꾸고 긍정하는 능청. ‘딴따라’다운, 그리고 무엇보다 한진오다운 해학적 표현이다.

타고난 끼와 작은 체구에서 발산하는 특유의 ‘까불까불’에너지로 사랑받아온 지역 예술계의 ‘막둥이’ 같은 존재인 한진오는 올해 어느덧 쉰한 살이다. 딴따라 길에 들어선 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진오는 스무 살 풍물패에 가입하며 ‘딴따라’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30년이란 세월을 지나며 한진오는 다양한 가면을 갖추었다. 현재는 희곡작가로 활동하며 작품 연출에 시간을 쏟고 있다. 제주 굿을 공부하는 연구자라는 정체성도 그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전수자의 길을 내려놓은 뒤로는 ‘야매 심방(무당)’의 역할을 맡아 굿 퍼포먼스 아티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7년에는 래퍼가 되어 제주의 문제를 고발하는 뮤직비디오(아래 영상)를 발표하기도 했다. 게다가 2018년에는 시각예술에도 도전했다.

한진오는 제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참여하고 참견한다. 세계로부터 버려졌으니 자기를 버린 세계를 찾아 쉴새없이 발품을 파는 것은 그의 숙명인 셈이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나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라면 한진오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한진오는 제주로 이주한 예술가들이 제주 신화와 문화에 ‘접신’하기 위해서 거쳐 가는 창구 역할도 하고 있다.

여전히 ‘까불까불에너지’와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청년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작품과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깊어진 눈빛을 보여주는 중견예술인 한진오. 그를 만났다.

천상 막둥이처럼 개구진 표정으로 웃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 1969년생 한진오

가난과 자그만 체구는 한진오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닌 콤플렉스였다. 유년에는 늘 위축돼 있었다. 나름 축구 팬이지만(EPL 아스날의 오랜 팬이다) 어린 시절 골을 넣은 횟수는 한 손가락으로 꼽는다. 기가 죽어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가난이 장애물이 됐다. 자연스레 책을 끼고 살았다.

한진오는 스무 살 도내 대학교에 입학해 탈춤동아리에 들어가며 딴따라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4.3진상규명집회가 열렸다. 아스팔트 거리로 나섰다. “뭘 알아서 갔겠어. 아무것도 몰랐지.” 그러나 바로 그 거리에서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눈을 뜨고 보니 이 사회는 문제가 아닌 곳이 없었다.

1988년이었다. 화염병의 시간이었다. 전두환은 내려왔지만 노태우가 집권했고 곧 공안정국으로 이어졌다. 스물한 살 방위병이 된 그의 이름에는 다른 이들처럼 학생운동 딱지가 붙어 있었다. 경찰서, 헌병대, 보안대로 끌려 다녔다. 보안대는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 “잘못한 게 있으면 차라리 영창 보내주세요.” 처신을 똑바로 하며 살라는 말을 들었다.

어릴 적부터 헛것도 자주 보고 무병을 앓아 온데다가 사물놀이에 열중하고 있으니 집에서 볼 때는 영락없는 심방이 될 팔자였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심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굿을 했다. 한진오의 20대는 거리, 풍물패, 굿판을 전전하는 시간이었다.

스무 살에 화염병을 든 뒤 세상일에 대한 관심을 한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한진오의 참견 혹은 참여는 현재까지 이어져 최근에는 제주도청 앞에서 제주 제2공항 철회를 위한 굿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애초에 거리에서 시작한 딴따라 인생이다. 여전히 거리는 한진오에게 주요 무대다.

난개발로 신음하는 현재 제주도의 모습이 한진오의 마음에 들 리 없다. 환경의 파괴, 마을의 파괴는 제주 신성의 파괴, 신앙의 파괴, 제주 정체성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예술가로서, 또 제주신화 연구자로서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한진오가 무대에서든, 거리에서든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눈물을 닦는 한진오. 한진오의 오른쪽 눈에서는 시시때때로 눈물이 흐른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래된 일이다. 병원을 찾았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사진=김재훈 기자)

# 한진오의 길잡이

마흔이 되기까지 이따금 대본 작업을 하긴 했지만 발표한 작품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갈증이 컸다. 혼자 숨어서 이런저런 글을 써왔다. 그걸 꿰뚫어본 선배가 있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김수열 시인이 한진오에게 “넌 글을 써야 돼”라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밀한 욕망을 들킨 기분이었다.

김수열 시인을 비롯해 네 명의 선배가 한진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김경훈, 김수열, 박경훈, 정공철 이 선배들이 내 롤모델로 대단히 고마운 길잡이들이주게. 내 머리를 굵게 만들어준 사람들이니까.” 아무리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천방지축 한진오지만 이 네 명의 선배 예술가를 얘기할 때는 제법 각을 잡았다. 아직 이 세계에 발붙이고 있어야 할 동기를 부여해 준 선배들이기 때문이다. 한진오는 특히 정공철과 김수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한진오는 정공철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한다.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탐라순례대행진이 있었는데 그때 정공철 형과 같은 그룹에 들어가신디, 행진을 해야 하는데 경찰에 막혀서 제주대학교 안에 갇혀버렸주게. 제주대 안에서 행사를 만들어 어떻게든 진행해야 해신디 그때 이렇게 저렇게 까불었더니 전국최고의 광대 정공철이 ‘이놈은 나를 이어서 대성할 딴따라가 될 거야’라고 말 한 거라. 내가 감히 정공철한테 칭찬받았다 생각하니까... 햐 제대로 구름을 탔지.(웃음)” 이때 정공철의 광대 유전자 중 일부가 한진오의 유전자에 새겨졌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는 김수열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열이 형을 따라잡으려고 형의 시집을 마구 탐독했주게. 게다가 수열이 형은 연출가로서 재능도 정말 대단했거든. 대학교 3학년 때 연출한 작품이 국립극장에 올려졌으니까 말 다했지. 김수열을 노골적으로 흉내내면서 따라 갔주게. 정공철과 김수열. 내가 따라가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

굿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 광대의 길, 글쟁이의 길

정공철의 길과 김수열의 길. 광대의 길과 글쟁이의 길. 한진오는 그 두 길을 따라 걸었다. 한진오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전수자로 들어갔다. 심방이 될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심방에 대한 동경만큼이나 두려움도 컸다. 무엇보다 딴따라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컸다. “심방이란 게 다름 아니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대속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걸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더라고” 심방이 되지 않는 굿을 총 세 번이나 치렀다. 이런 노력을 신이 알아보고 결국 한진오를 방목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앞으로 어떤 변덕을 부릴지는 모르지만.

심방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났어도 제주 신화와 굿에 대한 공부는 놓지 않았다. 민속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갔다. 인도 델리대학교로 국비유학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고민 끝에 학자의 길도 내려놓았다. 역시 딴따라로 살기 위해서다.

한진오는 이후 글쟁이의 길을 걸었다. 한진오는 2008년 거액의 상금이 걸린 신화 관련 스토리텔링 전국 공모전에 응모했다. 응모하기 전 원고를 강정해군기지 반대 투쟁 현장에서 만난 양윤모 영화평론가 보여주었다. 그때 양윤모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떨어지거나 대상을 받거나 둘 중 하나겠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무엇보다 글에 자신감이 붙었다. 마흔 넷이 된 2012년에는 제주MBC 다큐드라마 ‘유배 3부작’ 극본을 썼고 한국방송대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창작오페라 ‘광해, 빛의 바다로 가다’ 극본을 쓰는 등 현재도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 한진오의 쓴소리

최근 제주신화는 꽤나 핫한 ‘상품’이 되었다. 무대에 오르고 영상으로 제작되고 관광상품으로도 만들어진다. 제주신화와 굿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왜곡과 조악한 상품화는 우려할 만하다. 한진오는 예술가들이 제주신화와 굿을 대하는 모습을 얘기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제주신화 붐이라고는 하는데 제주신화와 굿을 밀도 있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없주게. 요즘 제주 신화를 거론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굿을 막연하게 이해하더라고. 굿은 굳어버린 문자 텍스트가 아닌데. 대중 앞에서 신화 관련 강의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작 굿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신화와 굿을 가져다 쓰며 권위만 내세우고 있으니 정말 보기 안 좋더라고. 예술가들이 깊이 있게 접근하지 않고 소재주의로, 낭만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예술가로서 치열함이 떨어지는 것 같아.”

한진오는 창작자들이 제주신화와 굿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충고도 있지 않았다. “굿이 됐건 뭐가 됐건 체화되어야 작품이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 우를 범한다는 걸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제주신화와 굿은 예전에 비하면 대단한 신드롬이 됐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신화와 굿을 찾아 접근하면서 막 대한다는 느낌이랄까. 많이 공부하고 깊이 있게 들어갔으면 좋겠어. 실제 굿을 보면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데. 굿의 메커니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는 거지. 굿에 대한 애정을 갖는 건 좋지만 애정을 갖는 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한진오는 굿판이 열릴 때마다 사진과 영상 촬영에 혈안이 된 '찍사'들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좋은 장면을 찍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는데 굿이 넓은 의미에서 문화인 건 맞지만... 신앙으로는 대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 제단에 올라와서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고... 답답한 현실이지. 정작 굿을 망친 장본인이 되어놓고서는 굿을 알리면 뭐해?" 

쉰 하나. 한진오의 눈빛이 깊어지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 한진오가 문학에 눈 뜰 때

쉰한 살.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한진오는 대중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2015년부터 나선 인문학 강의(물론 제주신화와 굿에 대한)는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당분간은 사물놀이와 공연무대, 랩, 시각예술까지 한껏 넓히고 있는 '청년'예술가 한진오의 활동 영역이 좁혀질 것 같지는 않다.

한진오는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풀어내고 싶은 무궁한 이야기들의 형태가 모습이 사물놀이로, 희곡으로, 시각예술로, 퍼포먼스로 변모하고 있는 것일 터. 한진오는 자신의 정처 없는 여정의 끝은 문학일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희곡집 등 책 두 권을 출판할 계획을 잡고 있다.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이 예술가는 참 할 말이 많은 이야기꾼이다. 말 많은 참견쟁이 이야기꾼 한진오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뿔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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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기자 humidtex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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