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는 지난달 21일부터 24일까지 재일제주인 최대 밀집 지역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를 다녀왔다. 답사를 통해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재일동포(자이니치 코리안), 특히 재일제주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했다. 아울러 일본 내에서의 제주4·3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 현황과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를 4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필자주>

“'조선시장'이라면, 양준오가 일제강점기부터 청년다은 열정으로 반일 감정을 키워가면서 찬양한 곳이었다. 양준오는 남승지가 고베에서 오사카로 찾아올 때면 함께 '이카이노'의 거리를 걸었고, 골목으로 발을 들이밀며 그의 '이카이노론'을 열심히 펼쳤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리 '황민화(皇民化)', '동화' 정책을 강행해도, 그리고 한복 착용이나 말을 금지시켜도, '이카이노'와 같은 생명력이 있는 한, 일본 제국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곳에는 한민족의 생활 원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신비한 생명력으로 계속 살아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관할 경찰서에서 한복의 착용을 금지시킨 적이 있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백주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자들의 흰옷에 먹물로 X표시를 해서 더럽히거나 경찰서로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한복 모습은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특별히 의식적인 저항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식생활 습관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한민족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나온 태도였던 것이었다.” 

-화산도 제2권 458쪽. 이카이노 조선시장을 묘사한 부분

#우리는 정대세, 안창림, 추성훈이 받았던 차별과 역차별의 눈물을 알고 있는가?​

​프로, 아마추어를 불문하고 일본의 스포츠 역사는 재일동포 체육인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레슬링의 역도산부터 프로야구의 장훈, 격투기의 추성훈 그리고 축구의 정대세, 도쿄올림픽 남자 유도 73㎏급 동메달리스트인 안창림까지 재일동포 체육인은 차고 넘친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이어진 차별과 멸시라는 간난을 겪으면서도 재일동포가 일본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치열한 생명력의 결과다. 

​머리가 명석해도 일본 국적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공무원이나 의사 같은 국가 자격증을 따기 어려웠던 시절에 재일동포들이 눈을 돌린 곳은 체육계다.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의 역도산(1924~1963년)은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씨름인 스모에 도전하려 했다. 하지만 조선인은 결코 최상위 지위인 요코즈나까지 올라갈 수 없는 벽을 알아챘다. 얼른 레슬링으로 전환해 패전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일본인들의 국민적 사랑을 받는 전설이 됐다. 

​경남 창녕 출신의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시절 차별을 겪은 장훈이 조선인의 한계를 실감한 게 프로야구 입문 때였다. 1개 구단에 외국인 2명만 두게 한 규정에 걸린 구단은 그에게 귀화를 권유했지만 “귀화하려면 야구를 그만두라”는 어머니 반대에 부딪쳤다. 장훈 모자의 사정을 들은 구단 사장이 프로야구연맹의 외국인 선수 규정을 고치고 입단을 시켜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첫 3000안타의 대기록을 세운다. ​

재일동포 3세로는 축구의 정대세가 꼽힌다. 한국 국적 아버지와 조선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국적을 지녔지만 조선총련 산하 조선학교를 다닌 영향으로 마음의 조국은 북한이다. 신무광이라는 재일동포 저널리스트는 그의 인생을 “역사가 낳은 모순”이라 했다. 북한 대표팀에서 뛰고 싶어 국적을 바꾸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한국 국적인 채로 북한 여권을 취득하고 국제축구연맹(FIFA) 승인을 얻어 국제대회에 출장했다. 수원 삼성에서도 활약한 적이 있는 정대세는 지금은 일본 J2리그 마치다 젤비아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안창림도 3세다. 아버지 태범씨는 창림을 “1, 2세가 겪은 차별이나 따돌림을 모르지만 가르침을 잘 이어받았다. 재일동포라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있다”고 평가한다. 재능을 눈여겨본 일본 대학 유도부에서 귀화를 권유했으나 딱 잘라 거부하고 한국 유학을 결정한 안창림이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긴 했지만 안창림에겐 “재일동포 대표로 승리해 재일동포의 존재를 전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다. 안창림이 한일에서 ‘재일동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서울신문 2021.7.29 재일동포 체육인 황성기 기고문) 

#코리아NGO 센터​

코리아NGO센터 곽진웅 대표(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사진=서군택)
코리아NGO센터 곽진웅 대표(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사진=서군택)

일본 오사카시의 코리아타운인 이쿠노(生野)구 쓰루하시(鶴橋)에 재일동포 인권·다문화 공생 배움터가 들어서 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재일동포의 인권 신장과 민족교육에 앞장서 온 코리아NGO센터(대표 곽진웅)는 작년 '이쿠노 코라이브즈 파크(IKUPA)'의 문을 열었고 IKUPA는 2021년 폐교한 미유키모리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곽진웅 대표는 “IKUPA의 전신인 미유키모리 초등학교는 재일동포 민족학급을 운영해 유네스코 학교로 지정을 받았던 곳이어서 다문화 공생의 배움터로서는 최적인 곳이며, 재일동포의 역사와 문화 및 인권 문제를 알리는 각종 교육과 전시를 비롯해 교재 제작·배포, 영상 제작을 활용한 정보 전파 등 다양한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유키모리 소학교 현판. (사진=서군택)
미유키모리 소학교 현판. (사진=서군택)

재일동포 이외에도 중국, 베트남 등 세계 60개 나라·지역 출신의 주민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다문화 마을이기에 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헤이트 스피치)이 횡행하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동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해 본다.

사단법인 오사카 코리아타운은 오는 4월 간사이 지방 재일동포 최대 집거지인 오카사 이쿠노구에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을 개관한다. 

(사진=오사카 코리아타운 제공)
(사진=오사카 코리아타운 제공)
역사자료관 개관을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다. (사진=서군택)
역사자료관 개관을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다. (사진=서군택)

 

#미유키모리 소학교​

오사카시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에 있는 미유키모리(御幸森)소학교가 2021년 4월부터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학생 수의 감소로 미유키모리소학교는 폐교되고, 나카가와소학교와 합쳐 오이케소학교로 재출발한다. 

​미유키모리소학교는 전체 학생 수 75명 중에서, 한국 뿌리의 학생이 51명이나 된다. 51명 가운데 45명이 이 학교에 설치된 민족학급에서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있었다. 

​이 학교 자녀들에게 한국을 가르쳐주길 바라는 학부모들의 노력으로 민족학급이 설치된 것은 1988년이다. 2021년에 폐교가 되면서 30여년 전통의 이 학교의 민족학급도 사라지게 된 셈이다.

미유키모리 소학교 운동장에서. (사진=서군택)
미유키모리 소학교 운동장에서. (사진=서군택)

 

#서승 교수​

자이니치 관련 가장 고통스러운 스토리 중 하나는 서승, 서준식 형제의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다. 1928년 할아버지가 일제의 수탈에 못 견뎌 일본으로 건너가고, 그의 아버지는 징용을 피해 숨어다니다 종전을 맞았고, 1945년 교토 근교에서 서승은 태어난다. 

서승 교수. (사진=제주투데이DB)
서승 교수. (사진=제주투데이DB)

​일본에서의 차별 속에 정체성을 고민하던 그는 1964년 도쿄 교대 1학년 때, 재일한국인학생 조국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해 4.19의 흔적 등을 돌아보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1968년 그는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동생 서준식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유학을 온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조국에 유학 온 이들 형제를, 간첩으로 몰았다. 

한차례 방북 사실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1971년 연행되어, 서승은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71년 박정희 정권은, 이들이 야당 김대중 후보에게 북한의 선거자금을 전달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경쟁자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고 흔들리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들 형제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보안사에서 고문을 견디다 못한 서승은 난로의 경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하다, 화상을 입은 얼굴로 사형 구형을 받았다. 

​무학이었던 어머니 오기순 씨는 아들들의 면회를 다니기 위해 50이 된 나이에 글을 배워 10년간 50번이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면회를 왔고, 1980년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앰네스티는 서승을 1974년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고, 앰네스티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석방운동이 벌어지는데, 한국의 민주화 이후 무려 투옥 17년째인 1988년에 서준식이 석방되고 1990년에는 서승도 석방되었다. 서승은 이후 리쓰메이칸대에서 인권운동과 투옥 경험을 강의하다 교수로 임용된다. 서준식은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역임했다.

#유학생 유영수, 거문도 섬소녀 김영희

유영수, 김영희 부부. (사진=다큐인사이트)
유영수, 김영희 부부. (사진=다큐인사이트)

9월 거문도 간첩 침투 사건으로 한 집안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남파 간첩은 거문도의 삼촌 집을 찾은 직후 사살되었다. 남파 간첩의 방문을 받아들였던 삼촌 일가족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문을 받았고 감옥에 갔고 세상에서 지워졌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막내딸 김영희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유영수를 만났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모국 유학을 선택한 유영수 역시 간첩죄로 복역 중이었다. 

​본인 때문에 동생과 친구들마저 구속되었기에 유영수는 수감 기간 내내 후회하고 자책했다. 긴 수감생활이 끝난 후 유영수는 김영희를 찾아가 청혼했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같은 분단의 고통을 겪은 여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두 사람은 오사카에서 한식당을 열어 아들과 딸을 키웠다. 

유영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김영희(앞줄 가운데) 부부. (사진=서군택)
유영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김영희(앞줄 가운데) 부부. (사진=서군택)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재심 변호를 위해 일본을 찾은 변호사들에게 유영수는 본인의 사건보다 처가의 재심을 간곡히 부탁했다. 반세기 만에 거문도 사건이 다시 법정에 섰다. 재판의 전개와 함께 거문도 사건이 만들었던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가족과 역시 거문도 사건으로 꽃피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기록한다. 

​“2022년 9월 1일 김영희 가족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전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국가의 폭력에 눈감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김영희 가족에게 사죄했다. 그날 누구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은 남편 유영수였다.”(KBS1 다큐인사이트 <간첩과 섬소녀> 인용)

#이철(李哲)의 장동일지(長東日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재일동포 2세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에 모국유학을 왔다가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 위반 혐의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복역했다. 당시 약혼녀였던 민향숙도 함께 구속돼 3년 반의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13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풀려난 지 20일도 채 되지 않은 1988년 10월 말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한참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

​현재는 오사카에서 살면서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이하 동우회)라는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동우회는 당시 질식할 것 같았던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고 조국을 찾았다가, 날조된 간첩 사건으로 투옥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한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모임이다.

이철, 민향숙 부부. (사진=리영희 재단 제공)
이철, 민향숙 부부. (사진=리영희 재단 제공)
민향숙, 이철 부부. (사진=서군택)
민향숙, 이철 부부. (사진=오사카/사진가 김봉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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